“저는 제게 남은 이 느낌을 살려야 해요.
그래서 눈뜨자마자 편지를 씁니다.“
꿈을 가로질러 현실에 가닿는 목소리
상대의 곤한 숨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연결해두는 밤
『잠든 사람과의 통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시적 공간은 꿈의 세계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어둠, 잠, 꿈을 주요 소재로 삼는 시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보통의 상황에서 꿈의 세계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을 투영하거나 현실의 불안을 반영하며, 무엇보다 고정된 시공간의 장면이나 상태를 그려낸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꿈이란 곧 현실세계와 다름없이 삶이 진행되는 현장이며, “꿈같은 광경도/현실에서만 볼 수 있다”(「염소가 열리는 나무」). 즉 현실세계와 꿈의 세계는 쌍방으로 영향을 미치고, 꿈과 현실 사이의 위계와 경계를 허묾으로써 하나가 되는 두 공간은 같은 방향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 방향이란 꿈만 같던 일을 현실로 가져오고, 빈번하게 찾아오는 슬픈 환상을 “생활이 물고 온 말들”(「실키」)과 “현실을 부둥켜안는 목소리”(「외따로이」)로 보듬을 수 있게 되는 지향이다. 그럴 때 현실의 힘은 환상을 거뜬히 넘어선다.
화자가 꿈에서 겪은 일은 현실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그가 꿈에서 ‘체험’하는 일들은 현실의 이야기로부터 파생되는 실제 사건으로 인식된다. 화자는 꿈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상을 일상적인 장면에 포개어보고, “모든 전면전에는 기억할 만한 어둠이 있음”(「회문(回文)공작소」)을 실감하며 밤을 자각한다. 「꿈의 꿈치들」에서는 환상과 현실의 이음매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꿈을 꾸는 데에 서투른 이른바 ‘꿈치’들을 나열한다.
홀로 밤을 견디는 일은 시인에게 고통스러운 노동과도 같은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김민지는 “흩어지던 꿈속”에서도 “어떤 밤의 밑면”(「구석을 내밀면」)을 염두에 둔 채 어둠 속에서 올곧게 빛을 바라본다. 어떠한 가능성을 한없이 기다려온 사람 특유의 쓸쓸한, 그러나 끈질기게 차분한 감각이다. 그리고 「후무사 자두」에서는 자두의 일종인 ‘후무사’로부터 ‘후무사’라는 이름을 가진 꿈속의 절을 상상하기에 이른다. “‘후무사’는 물론 “절이 아니”지만”(해설), 꿈속에서 어떠한 장소로 해석될 때 우리는 서로 만나 하트를 닮은 이 상큼하고도 끈적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네가 너를 안아주”는 일이 가능해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태어나 “사랑”을 거듭할 수 있게 된다(「후무사 자두」).
다시 말해, 이 시집은 꿈을 꾸듯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논리적인 이해보다 직관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시인은 계속해서 “잠든 사람”의 꿈을 현실에 주사(走査)하고(「인부의 말」), 실제로는 먼지 낀 잡음만을 들을 수 있을 텐데도 상대와의 통화를 쉽사리 끊어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잠들지 못한 자신의 편안함보다 잠이 든 상대의 평온을 더욱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이 서투른 마음을 주고받은 결과로서 사랑은 자라고, “덤불을 이”루면서 손을 잡고, 긴 터널을 통과하여 마침내 땅을 뚫고 솟아나오는 “지구의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한다(「깍두기공책」). 사람이기에 끊임없이 엄습하는 “자신 없음”(「인부의 말」) 속에서도 여전히 속절없는 사랑의 가능성을 건네는 방향, 우리는 어쩌면 이것을 ‘김민지식 희망’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세세한 사랑이 가능할 것만 같은 기분을, 그러한 예감을 선사하는 시집이 이미 우리 앞에 도착해 있다.
도서정보 : 김민지 지음 | 창비 | 392쪽 | 값 1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