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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부산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출판저널 편집부 2024-06-10 11:08:26 조회수 454

한국 미스터리계에 등장한 악마 같은 작가, 무경의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적인 상황에 인간을 몰아넣고 타락시키는 악마 이야기,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로 《계간 미스터리》 2023년 가을호 신인상을 수상하며 강렬한 인상을 준 작가. 이번 장편소설에서는 1928년 식민지 근대 부산, 그 혼란 속을 살았던 뜨거운 마음들을 능수능란하게 주무르는 미스터리를 펼친다.

‘마담 흑조 시리즈’의 첫 편인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은 화마로 치명적인 병마와 싸우는 마담 흑조와 그를 보살피는 2인조가 부산에서 마주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미스터리다. 소설은 애거사 크리스티를 충실하게 계승한 클래식 미스터리인가 싶다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로 변속한다. 판타지인가 싶으면 반박할 수 없는 이성적인 논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1928년 일제강점기, 부산의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는 시대극으로 읽히면서도, 흡입력 있는 독창적인 인물들이 활약하는 캐릭터 소설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건은 인간의 불안한 마음들이 조합해 낸 이야기다
이야기의 본질을 꿰뚫는 암흑 같은 눈빛, 마담 흑조!


“요괴인 걸까? 마음을 읽는 요괴 사토리?
속마음을 꼭꼭 숨기고 살아야만 하는 이런 세상에서는 정말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잿더미를 떠올리게 하는 생기 없는 창백한 얼굴, 상대를 바라보는 깊고 공허한 두 눈은 마치 시야에 담은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아득하다. 화재로 치명적인 병마를 얻어 다리를 절며 흡사 죽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만 같고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희미하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 갑부의 무남독녀. 센다 아카네. 조선 이름은 천연주. 경성에서 작은 다방 ‘흑조’를 운영하며 병마와 싸우면서도 이야기에 탐닉하는 기벽을 지녔다. 손님들에게 곤란한 사정 이야기를 청해 듣고 답례로 숨은 진상을 헤아려 준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조용히 퍼져나가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어난다.
마담 흑조는 듣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허점을 추론한다. 그리고 그녀의 방식으로 이야기에 개입하여 실타래처럼 엉킨 현실을 재구성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추리와 동시에 상황을 사전에 기획하고 계획하는 마담 흑조. 그럼으로써 이야기에 이야기로 맞서는 것, 마담 흑조의 방식은 묘한 마력을 느끼게 하는 미스터리를 탄생시킨다.


한국 미스터리계에 등장한 악마 같은 작가, 무경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마음을 퍼즐처럼 조립하는 이야기꾼


《계간 미스터리》 2023년 가을호에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무경은 역사적인 소재를 악마적인 이야기성으로 풀어내는 작가다.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 상황에 인간을 몰아넣고 타락시키는 악마 이야기인 〈치지미포, 꿩을 잡지 못하고〉는 강렬하고 새로운 한국 미스터리 작가의 탄생을 예고했다.
이번 장편소설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에서는 1928년 식민지 근대 부산, 그 혼란 속을 살았던 복잡하고 뜨거운 마음들을 능수능란하게 주무르는 미스터리를 펼친다. ‘마담 흑조 시리즈’의 첫 편인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은 식민지 근대 부산이 배경인 장편 연작소설로, 장대한 ‘은일당 유니버스’의 한 축을 담당하는 천연주의 이야기다. 숨겨진 의도들이 헝클어트린 이야기를 들을 때 그녀의 진가가 발휘된다. 언뜻 보기에 불가해하고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정연한 순서로 바로잡으며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과 마주한다.

이 책은 마담 흑조가 그를 좌우에서 보살피는 강 선생, 야나 씨와 함께 방문한 부산에서 세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미스터리 활약담이다. 소설은 애거사 크리스티를 충실하게 계승한 클래식 미스터리인가 싶다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로 변속한다. 판타지인가 싶으면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사건을 해결한다. 1928년 일제강점기, 부산의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는 시대극으로 읽히면서도, 흡입력 있는 독창적인 인물들이 활약하는 캐릭터 소설의 면모를 보여준다.


“스스로 탐정이라 칭한 적은 없습니다.
다른 이의 곤란한 사정 이야기를 청해 듣길 좋아하는 기벽을 지녔을 뿐.”

이 책은 마담 흑조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1장에 나오는 민속학자 손 선생에게 마담 흑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하는 인간이다. 야시고개에 사는 여우에게 탐정 일을 부탁받았다고 말하고 특이한 시종들과 함께 하는 묘한 사람이다. 2장에 나오는 일본인 의사에게 마담 흑조는 잿더미 유령, 마치 죽은 사람이 걷고 있는 것 같은 인간, 마음을 읽는 요괴 사토리, 이질감과 혐오감,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다. 3장에 나오는 부두노동자이자 밀정인 경석에게 마담 흑조는 노동자의 가난을 자극하는, 신분상의 상대적인 박탈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친일파의 딸이자 저승사자다.
각 장의 주동인물 눈에 비친 마담 흑조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작가는 마담 흑조를 직접 묘사하기보다 상대의 눈을 통해 그림으로써 마담 흑조와 주동인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보는 사람의 심리가 투사되어 그때마다 달라지는 마담 흑조의 모습은 파악되기 힘든 미스터리 그 자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는 단지 마담 흑조의 기벽만을 분명하게 안다. 상대에게 말하기 곤란한 이야기를 청해 듣는다는 것.


구포 야시고개, 동래온천, 부산항…
경성과는 다른 이야기를 품은 식민지 근대 부산의 독특한 매력


이야기는 마담 천연주가 경성에서 부산으로 요양을 떠나는 경부선 기차 안에서 시작한다. 식민지 근대를 배경으로 한 대다수의 이야기가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대조되는 선택이다. 작가가 묘사한 1920년대 후반의 부산은 왜구의 본거지와 위치적으로 가까우면서도 그만큼 활발한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근대 부산이라는 대도시는 경성과 비슷한 듯 다른 풍경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온 조선인의 삶을 품고 있다. 부산 출신인 작가는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부산중구청 등의 도움을 통해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린다. 당시 부산에서도 손꼽히게 큰 숙박 시설이었던 아라이여관, 일제 강점이라는 서러움과 활발한 일상생활 풍경이 공존했던 구포 장터, 조선에서 가장 조선답지 않은 장소인 장수통 일대에서 펼쳐지는 마담 흑조 3인방의 활약담은 몰입도 높은 시대극의 재미를 선사한다.

구포 야시고개-동래온천-장수통으로 이어지는 세 가지 이야기는 각각 완결성을 지니면서도 일관된 흐름으로 거대한 서사를 향해 나아간다. 1장〈마담 흑조는 매구의 이야기를 듣는다〉에서는 천연주가 지병으로 급작스럽게 내린 구포에서, 천 년 묵은 여우의 의뢰를 받았다면서 수상한 소문의 진상을 파악한다.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의 정취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2장 〈마담 흑조는 감춰진 마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애거사 크리스티를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동래의 한 온천장을 배경으로 벌어진 불가사의한 살인 사건을 특유의 기지로 해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3장〈마담 흑조는 지나간 흔적의 이야기를 듣는다〉에서는 부산의 전차 노선을 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색’과 쫓고 쫓기는 추적을 벌인다. ‘회색’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일제의 지배 아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신산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청춘들의 모습이 씁쓸하게 드러난다.

천연주에게 이야기는 단순한 오락이나 탐정 노름이 아니라 삶의 비의를 드러내고 죽음을 이기는 수단으로써 절박한 기능을 수행한다. 서사가 범람하는 시대, 이 책을 통해 이야기의 본질을 추구하는 빼어난 이야기가 주는 순수한 쾌감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도서 정보  :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92쪽  |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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