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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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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에 귀 기울일 때

출판저널 편집부 2023-10-31 10:30:02 조회수 558

한순간에 아무 소리도, 가족도 없는 세계를 맞닥뜨린 소년이

이 거대한 절망에 맞서 온몸으로 내지르는 소리 없는 외침

적막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적막에 귀 기울일 때』는 청소년 소설로 2015년과 2022년, 두 차례 BBC 우크라이나 올해의 책에 선정된 작가 안드리 바친스키의 첫 선정작이다. 책은 한순간에 장애를 얻고 고아가 되어 버린 소년이 온몸으로 절망에 맞서며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생생히 담아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애인 아동 인권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어린 약자들에게 관심 가져 볼 것을 제안한다. 주인공이 가진 거대한 희망의 에너지를 전해 받은 후엔, 여러분도 적막에 귀 기울여 보기를 기대한다.

주인공인 열네 살 피아니스트 세르히는 교통사고로 부모님과 여동생, 심지어 청력마저 잃어버리고 농인 기숙 학교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야린카라는 아이를 만나고, 피아노를 통해 둘만의 방식으로 소통하면서 서로를 친남매처럼 아끼게 된다. 하지만 곧 야린카의 가정폭력범 아빠가 출소해 야린카를 집으로 데려가고, 이미 모든 걸 잃은 세르히는 마지막 남은 희망 야린카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로 기숙 학교를 빠져나와 험난한 세상 속에 발을 들인다.
 선정 및 수상내역
2015 BBC 우크라이나 올해의 책 아동 도서 부문 선정작



끊임없이 절망에 저항하는 소년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다
2015 BBC 올해의 책 심사위원 스비틀라나 피르칼로는 『적막에 귀 기울일 때』를 “우크라이나어로 쓰인 『올리버 트위스트』”라고 평했다. 그만큼 주인공 세르히는 우리가 평소에 겪지 못할 여러 풍파에 부딪힌다. 작가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소용돌이에 끊임없이 휘말리는 우크라이나 청소년을 주인공 삼기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 말의 정수를 보여 준다. 많지 않은 지면이 사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사건들이 만드는 이야기는 역동적이고 긴장감 넘친다.
핍진한 배경 묘사 덕에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실제 우크라이나의 곳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르비우의 기차역에서는 악덕 경찰 ‘코쿠덕’이 상주하는 경찰서나, ‘싸움닭 상카’가 아이들을 가둔 지하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개성이 듬뿍 담긴 인물들은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하다. 특히 누구도 불쌍한 희생자로 묘사되지 않고, 그 자체로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하나의 인물로서 제시된다는 점이 감명 깊다.
주인공인 세르히는 한순간에 농인의 세계와 고아의 세계, 그 교집합에 놓였다.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고 가장 자신 있던 피아노 연주도 할 수 없게 된 데다 그 고민을 나눌 가족도 더 이상 세상에 없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세르히는 한 줄기 희망을 놓치지 않고 응시한다. 책은 그런 소년의 내면을 세심히 드러내면서도 독자를 그의 삶 속으로 설득력 있게 끌어들인다. 그로써 독자는 세르히가 되어 그의 눈으로 새로이 마주한 세계를 관찰하고, 그와 함께 비극을 경험하고, 좌절과 희망을 느낀다. 그리고 부조리에 저항하며 새로운 것들을 익혀 나가고, 종국에는 함께 성장한다.

아이 하나를 구하는 일은 온 우주를 구하는 일과 같다
작가는 실제로 어릴 때 두 군데의 청각 장애인 전용 기숙 학교가 있는 마을에 살았고, 그때 목격한 현실을 소설 속에 녹여 냈다. 아내를 살해한 범죄자를 조기 출소시키고 그 밑으로 어린 딸을 다시 돌려보내는 아동 보호국, 뇌물을 받고 장애인 아동 착취를 침묵하는 경찰, 범죄자 부모의 방관 아래 학교 폭력을 자행하는 학생들……. 너무나 소설적인 이 사건들은 형태만 조금씩 바꾼 채 우리 주변에도 엄연히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작가가 무엇보다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보편적인 어른들의 무관심이다. 몰려다니며 구걸하는 장애인 아동들에게, 기차에 탄 승객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의 손에 돈 몇 푼을 쥐여 주고 죄책감을 덜어낼 뿐이다. 아이들은 무력감을 내면화하고, 부조리의 굴레는 더 확고해진다. 다른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닫는 우리가 농인보다 더 잘 듣는다고 할 수 있을까? 책은 우리가 외면하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는 낙관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장애인 아동을 둘러싼 세계가 언제나 잔인하거나 절망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만은 아니다. 책에는 주인공 세르히를 돕는 여러 어른이 등장한다. 그중 한 사람인 바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 하나를 구하는 일은 온 우주를 구하는 일과 같다.”
책을 읽고 나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얼마나 불완전한지 다시금 실감할 수 있다. 적어도 아동들에게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당연히 누릴 기회가 있어야 한다. 『적막에 귀 기울일 때』는 그런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말을 듣는다. 그렇게 적막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단 그러고 나면, 독자의 마음 안에서도 부조리한 현실과 자신의 무관심에 맞설 용기가 솟아날 것이다.

도서정보  :  안드리 바친스키 지음  |  이계순 옮김  |  씨드북  |  168쪽  |  값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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